고국에 있을 때는 수많은 친구들과 술 마시며 얘기하느라 지새웠는데, 미국에 오니 아는 사람이라곤 아내밖에 없고 집을 나서는 순간 벙어리로 지내야 했다. 나는 한순간에 의기소침해졌다.


미국에 온 지 한 달쯤 되었을 때 전화번호부를 뒤져 여기 저기 전화해서 집에서 가까운 병원의 외과 조수 자리를 구했다. 그렇게 구한 외과 조수 자리였지만, 막상 병원에서 조수로 불리고 보니 기분이 나빴다. ‘닥터정이 아닌 미스터정이라고 불리는 것이 몹시 야속했다. 더구나 규정상 조수는 의사 식당에서 밥을 먹지 못했다. 자존심이 몹시 상해서 나는 내년에 수련의 과정에 들어가기까지 잠시 조수로 일할 뿐이라고 누가 묻지도 않은 말을 하고 다녔다. 어느 누구도 내 말에 귀 기울여 주지 않았고 그들이 귀를 기울일 만한 말을 하지도 못했다. 나는 점점 외로워졌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생기더니 도무지 이 질문이 내 안에서 떠나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에 둘러싸여 닥터 정으로 살다가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는 이 무인도 같은 곳에 버려진 나는 누구인가? 나는 도대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존재인가?


대학 시절 나는 실존주의를 맹목적으로 신봉했다. 그래서 매 순간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며 사는 것이 인생의 주인으로 사는 길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미국행을 결단하고 이행하기까지 나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했지만, 미국에서 나는 내 인생의 주인 같지 않았다. 당시 나의 졸업 동기생 일곱 명이 뉴욕과 뉴저지에 살고 있어서 한 달에 한 번 그들을 만나는 것이 유일한 위로였다. 나는 더 이상 지난날 술잔을 비우며 삶을 호령하던 내가 아니었다. 내가 처한 상황에 바득바득 숨이 차서 헐떡일 뿐이었다.


                정수영이 쓴 <심장이 뛴다>중에서